생각의 틈새/reading!

채호기, 책을 연다

메이준 2011. 10. 14. 01:01


책을 연다

채호기

그 펼친 페이지에 글자들이 알약처럼
가지런하다. 당신이 그 글자들을
물도 업이 음복하려 할 때, 유리창에 난
기스나 얼어붙은 무늬의 성에 같은 성가시거나
어디론가 곧 사라져버릴 글자들, 그곳은

깊이와 폭을 측량할 수 없는 어줌이 된다.
있어왔던 삶의 급작스런 단절, 눈 뜨고도
눈 감은 것처럼 세상은 사라지고, 미궁의
암흑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당신의
상상이 지금까지 없었던 미지의
세상을 다시 산출하려 할 것인가?

당신이 습관처럼 글자들을 읽을 때
세상은 언제나 글자들 뒤로 깜빡
사라진다. 당신이 깜빡 눈을 감았을지도
모른다고 고개를 갸웃할 때에도……

자모(字母)의 소리와 단어의 위치, 낱말들의
상호 침투가 순식가넹 당신의 머릿속에,
문형(文型)의 질서 속에 하나의 문장이 되어
판독되려 할 때, 그게 모두 저절로,
당신 혼자 한 것인가?

잠시 의문을 가질 때, 그 잠시는
깊고 긴 어둠의 함정일 수도 있다.
형광등이 깜빡거릴 때 한순간의
어둠처럼 당신의 머리도 깜빡 꺼진
암흑의 미궁 속에 내동댕이쳐졌는지 모른다.

당신이 무심코 글자들을 읽을 때, 깜빡,
세상이 사라진 암흑의 저 깊은 곳에서
글자들은 하얗게 반짝이며 당신의
목덜미에 박힐 것이다. 그 이빨을 가진
문장, 책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당신
살에 박힐 것이다. 암흑의 미궁 속에서
깨어난 새로운 세상이 당신을 덮칠 것이다
아아, 황홀함!아아, 겁탈의 순간이여!
온몸의 에네르기가 사출되고 난 뒤,
절정의 텅 빈 현기증이여!

책을 연다. 당신의 열쇠가 그녀의
열쇠 구멍에 꽂히는 순간 책은
펼쳐진다. 그곳에 그녀의 날카로운
단어들이 희고 부드러운 육체 속에서
번득인다. 그녀의 벌거벗은 문장들이
스펀지처럼 당신을 빨아들이고
당신의 텅 빈 세계는 미지의
그녀로 가득 채워진다.





---

요즘 읽고 있는 채호기 시인의 <손가락이 뜨겁다>(문지)라는 시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