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唐), 송(宋)대 문인들 정보1.
1. 여본중(呂本中, 1084~1145)
중국 남송의 시인. 본명은 대중(大中). 자는 거인(居仁), 호는 동래선생(東萊先生). 수주(壽州 : 지금의 안후이 성[安徽省] 펑타이[風臺]) 사람이다. 원우연간(元祐年間 : 1086~94)의 재상 여공저(呂公著)의 증손자이며, 여호문(呂好問)의 아들이다. 선조의 덕택으로 관직에 들어섰지만, 신법(新法)·구법(舊法)의 당쟁에 말려들어 여공저가 추방되자 그 역시 관직을 사임했다. 1136년(紹興 6)에 진사가 되었으며, 중서사인(中書舍人)·권직학사원(權直學士院)을 역임했다. 재상 진회(秦檜)의 뜻을 거역하여 관직에서 파면되었다. 그의 시는 그 자신이 강서시파(江西詩派)를 계승하여 '활법'(活法)과 '오입'(悟入)을 위주로 한다고 밝혔다. 황정견(黃庭堅)·진사도(陳師道)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그뒤 시풍이 많이 바뀌었다. 송이 남도(南渡)한 뒤에는 나라를 걱정하는 침통한 작품을 썼다. 일찍이 〈강서시사종파도 江西詩社宗派圖〉를 지었으며, 〈동래선생시집 東萊先生詩集〉·〈자미시화 紫微詩話〉 등을 남겼다.
2. 소식(蘇軾, 1037~1101)
북송 제일의 시인으로 자는 자첨(子瞻),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이며 파공(坡公), 파선(坡仙) 등으로도 불렸다. 미산(眉山, 지금의 사천성) 출신으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22세 때 진사에 급제하고, 구양수(歐陽修)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후원으로 문단에 등장하였다. 구법당으로 초기에는 왕안석의 신법당에 밀려 지방관을 역임했고, 44세에 필화사건으로 인해 심한 취조를 받은 뒤 호북성(湖北省)의 황주(黃州)로 유배되었으나, 50세가 되던 해 철종(哲宗)이 즉위함과 동시에 구법당이 득세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 등의 높은 관직을 역임했다. 신법당이 다시 세력을 잡은 뒤 해남도(海南島)에 유배되었고, 7년의 유배생활 후 돌아오던 중 강소성(江蘇省) 상주(常州)에서 사망하였다.
3. 한유(韓愈, 768~824)
한문공(韓文公)이라고도 한다. 중국과 일본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후대 성리학(性理學)의 원조이다. 어려서 고아였고, 처음 과거에 응시했을 때는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문체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 낙방했다. 그 후 25세에 진사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이부시랑(吏部侍郞)까지 지냈다. 사후에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추증되었고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는 영예를 누렸다. 유학이 침체되어가던 시기에 유학을 옹호했던 그는 헌종(憲宗)이 불사리(佛舍利)에 참배한 데 대해 끝까지 간(諫)한 일로 인하여 1년 동안 차오저우[潮州] 자사(刺史)로 밀려나 있었고, 평생을 불우하게 지내야 했다. 유학을 옹호하기 위해 그때까지 유학자들이 다소 소홀히 하던 〈맹자〉·〈대학 大學〉·〈중용 中庸〉·〈주역 周易〉을 광범위하게 인용했다. 후대의 성리학자들은 기초개념을 이 책들에서 취했고 한유는 성리학의 기초를 놓은 셈이었다. 한유는 당시에 유행하던 규칙적인 운율과 고사성어로 가득 찬 변려문(騈儷文)을 배격했고, 위의 책들을 만든 옛 학자들처럼 자유롭고 간결한 문체의 사용을 주장했다. 그가 쓴 〈원도 原道〉·〈원성 原性〉 등은 중국문학의 백미이며 그가 주장한 고문체 문장의 대표작이 되었다. 시문학에서도 그는 기존의 문학적 형식을 뛰어넘으려고 했다. 그러나 문학에서 그가 기울인 노력의 많은 부분은 실패로 끝났다.
4. 임포(林逋, 967一1028)
林和靖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는 군복이며 대리황현촌 사람이다. 어릴 때 배우기를 좋아하였고 경사백가에 통달하였다. 책에서는 성품이 고상하고 담박한 것을 좋아하며 영예와 이익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인이 되어서 강회지역을 노닌 적이 있었고 후에 항주서호에 은거하여 산에 집을 지어 살았다고 한다. 작은 배를 타고 서호가의 여러 사찰을 노닐었으며 고승들과 교유하였다. 매번 손님이 오면 동자를 시켜 학을 날려보내었다. 임포가 학을 보면 반드시 배머리를 돌려 돌아왔다. 시를 지음에 있어서 짓자마자 버렸기에 남은 것이 없다. 1028년에 죽었으며 송인종이 ‘화정선생’이란 시호를 내려주었다.
5. 이상은(李商隱, 812~858)
중국 당(唐)나라 말기의 시인. 자는 의산(義山). 회주(懷州) 하내(河內: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친양 현[沁陽縣]) 사람이다. 스스로 옥계생(玉谿生)이라고도 불렀는데, 이것은 고향 가까이에 옥계라는 계곡이 있었고, 어렸을 때 거기에 있는 도교사원에서 학문을 닦은 것과 관계가 있다.
어린시절 말단 관리였던 아버지를 여의고, 829년(太和 3) 18세 무렵 당시의 천평군절도사(天平軍節度使) 영호초(令狐楚:765~837)에게 문재(文才)를 인정받아 그의 막료가 되었다. 그때까지 한유(韓愈:768~824)·유종원(柳宗元:773~819)의 고문을 신봉하고 있던 이상은은 영호초가 당시 변려문(騈儷文)의 대가였던 까닭에, 곧 그의 작문법을 배우게 되었다. 나중에 온정균(溫庭筠:812경~780경)·단성식(段成式)과 함께 변려문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영호초와의 만남으로 인해 그의 문학이 꽃을 피우고 관리로서 출발하게된 반면 그의 생애에 걸친 불운이 시작되기도 했다. 그무렵 당의 조정은 2개의 당으로 나누어져 격렬한 정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른바 '우(牛)·이(李)의 당쟁'으로, 귀족출신자로 이루어진 이덕유(李德裕) 일파와 진사출신의 우승유(牛僧孺)·이종민(李宗閔) 일파의 파벌투쟁이었다. 영호는 우승유파였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고급관료를 지향하는 한 그 당쟁에 개입되었으며, 이상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후에 여러 벼슬을 거쳤지만 왕무원이 이덕유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이상은은 절조를 잃은 사람이라는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신당서 新唐書〉에는 "유·이의 당인은 이상은을 비웃고 비난했으며, 궤변이 많고 경박하며 도덕관이 결여된 자로서 두 파로부터 배척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번째 비호자가 된 왕무원도 843년(會昌 3)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 이후 이상은은 더 곤궁해지고, 우·이 두 당 사이를 오갔다. 이덕유파의 정아(鄭亞) 아래서 장서기(掌書記)의 직책을 겨우 얻었다가 곧 좌천되어 소꿉친구인 반대당의 영호도에게 애원하여 은혜를 잊은 자로 매도당하면서도, 태학박사(太學博士)의 직책을 맡았다. 858년(大中 12)에 병으로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
6. 양만리( 楊萬里, 1127~1206.)
중국 남송시대(南宋時代 : 1127~1279)의 시인. 양성재(楊誠齋)라고 잘 알려져 있다.
자는 정수(廷秀)이고 호는 성재이며 강서 길주 사람이다. 남송의 대시인이며 한평생을 금나라와 대적하는데 바쳤다. 범성대, 육유, 우무와 함께 “중흥사대시인”으로 불리우고 있다. 다작(多作) 시인으로 유명한 그는 평생 동안 2만 수의 시를 지었는데 지금은 4,200여 수만이 남아 있다. 초년에 그는 강서시파(江西詩派)를 배웠으나 중년에는 왕안석(王安石)과 만당(晩唐)의 시를 배웠다. 그의 시는 변화가 다채롭고 구상과 구성이 기발했으며, '대자연을 본보기로 삼는다'(師法自然)는 원칙으로 성재체(誠齋體)라는 독특한 문체를 만들었다. 생기있고 자연스러운 시어를 사용했고 상상력이 풍부하여 참신하고도 정교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풍경의 특성과 변화를 잘 포착했으며, 해학과 유머가 가득하여 당시 사람들은 '살아 있는 필치'(活法)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한때 그는 국사와 민생문제에 관한 시를 쓴 적이 있으며, 산문과 사부(詞賦)에도 뛰어났다. 유명한 작품으로는 〈천려책 千慮策〉·〈오계부 浯溪賦〉, <백학봉>, <동파 옛터를 노닐다.>, <혜주 신교에서 배를 대다>, <풍호를 노닐다> 등이 있고, 그밖에 〈성재집 誠齋集〉이 전한다.
7. 육유(陸游, 1125~1210)
송나라 월주(越州) 산음(山陰) 사람으로 12세 때부터 시문에 능하였다. 많은 관직을 역임하고 파직되어 10여 년간 한가로운 생활을 하다가 가태(架泰) 2년에 다시 조정에 나가 실록원(實錄院)에서 효종(孝宗)과 광종(光宗)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그 일을 마치고 나서 보장각 대제(寶章閣待制)로 치사(致仕)하였다. 그는 특히 시문에 능하였는데 그의 시는 감상적이고 호탕한 기상이 있었으며 우무(尤袤), 양만리(楊萬理), 범성대(范成大)와 함께 중흥 사대가(中興四大家)로 호평을 받았다. 대표적인 시로는 〈초추취량시(初秋驟凉詩)〉가 있다.《宋史 卷395 陸游列傳》
8. 증기 (曾幾, 1085~1166)
曾茶山으로 잘 알려져 있다. 南宋의 시인으로, 字는 吉甫이고 自號는 茶山居士이다. 선조는 贛州(현재 江西贛縣) 사람이며, 河南府(현재 河南洛陽)에 옮겨와 살았다. 江西와 浙西의 提刑, 秘書少監, 禮部侍郎 등을 지냈다. 학식이 깊고 넓었으며, 政事를 부지런히 하였다. 그의 제자 陸遊는 「曾文清公墓誌銘」(『渭南文集』권32)에서 “治经学道之餘, 发于文章, 雅正纯粹, 而诗尤工.”라고 그를 평하였다. 처음에는 吕本中의 「江西诗社宗派图」 25인에 들지 않았으나 후대 사람이 그를 江西诗派에 넣었다. 그의 시는 대부분 서정을 읊거나 화답을 나눈 것으로 闲雅하고 맑고 고상하다[清淡]. 5․7언 율시의 對偶가 자연스러우며, 氣韻이 疏畅하다. 古體로는 「赠空上人」, 近體로는 「南山除夜」 등이 있다. 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