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당파(三唐派)시인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이달(李達)을 일컫는 말이다. 고려시대 이래 한국의 시인들이 대개 중국 송(宋)나라의 소동파(蘇東坡) ·황산곡(黃山谷) 등을 배워왔는데, 이 세 사람은 당시(唐詩)를 배우는데 힘을 기울여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수준은 만당(晩唐)에 머물렀으며, 성당(盛唐)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한다. 이들 중에서도 이달이 특히 뛰어난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1. 최경창

본관 해주(海州). 자 가운(嘉運). 호 고죽(孤竹). 박순(朴淳)의 문인. 문장과 학문에 뛰어나 이이(李珥) ·송익필(宋翼弼) 등과 함께 팔문장으로 불리었고 당시(唐詩)에도 능하여 삼당파(三唐派)이라고도 일컬어졌다. 1568년(선조 1) 증광시문과(增廣試文科)에 급제,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 ·종성부사(鍾城府使)를 지냈다. 1583년 방어사(防禦使)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었으나 상경 도중 죽었다. 시와 서화(書畵)에 뛰어났으며, 피리도 잘 불었다. 숙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문집에 《고죽유고(孤竹遺稿)》가 있다.

2. 백광훈

본관 해미(海美), 자 창경(彰卿), 호 옥봉(玉峯)·기봉(岐峰)이다. 박순(朴淳)의 문인으로 13세에 상경하여 양응정(梁應鼎)·노수신(盧守愼) 등에게서 배웠다. 1564년 진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뜻이 없었고 1572년(선조 5) 명나라 사신에게 시와 글을 지어주어 감탄케 하여 백광선생(白光先生)의 칭호를 얻었다. 송시(宋詩)의 풍조를 버리고 당시(唐詩)의 풍조를 쓰려고 노력하여 최경창(崔慶昌)·이달(李達)과 함께 삼당파(三唐派) 시인으로 불린다. 팔문장(八文章)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고 영화체(永和體)에도 빼어났다. 1590년 옥봉서원에 제향되었고 문집으로 《옥봉집》이 있다.

3. 이달

본관 함안(咸安). 자 명숙(明淑). 호 운포(雲圃). 이황(李滉)에게 《소학》을 배웠으며 무예를 겸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고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최강(崔堈)과 함께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분전하고 있는 진주성에 합세하여 1차 진주싸움을 승리로 이끌고 성을 지켜냈다. 그러나 1593년의 2차 진주싸움에는 일본군의 세력이 너무 커서 응원할 것을 포기하였다. 진주성에서의 공으로 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고 훈련원정에 임명되었으며 권무과(勸武科)에 급제하고 양산군수가 되었다. 1614년(광해군 6) 선전관에 임명되었으나 북인에 의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하자는 논의가 일어나자 상경 도중에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해 가을에 삼도통제우후(三道統制虞侯)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듬해에는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팔문장 [八文章]

조선 중기에 널리 문명(文名)을 날리던 8대 문장가. 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1537∼1582),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 중호(重湖) 윤탁연(尹卓然),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고담(孤潭) 이순인(李純仁:1543∼1592),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간이(簡易) 최립(崔:1), 청천(菁川) 하응림(河應臨) 등 8인을 말한다.




출처는 인터넷 백과사전.
Posted by 메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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