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광(1563- 1628) :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이다.
1. 사회상황
그는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중요한 관직을 모두 지냈으며, 세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던 일만으로 보아도 관료로서의 구실을 충분히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그의 활동 시기에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치르고, 광해군 때의 정치적 갈등과 인조 때의 이괄(李适)의 반란을 겪었던 어려웠던 정국에 살면서도 당쟁에 휩쓸리지 않았으며, 언제나 강직하면서도 온화한 입장을 지켜 그 시대의 성실하고 양식 있는 관료요 선비로서의 자세를 지켰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면모는, 사회적 변동기에 새로운 사상적 전개 방향을 탐색하고 개척한 학자로서의 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그는 조선사회가 전기에서 후기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사회변화와 더불어 발생하게 될 실학파의 선구적 인물로, 사상사 내지 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는 것이다.
이수광이 두드러지게 활동하던 반세기 초기는 이미 16세기후반에 있어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로 정점을 이루는 성리학의 이론이 성숙되었던 다음 시대로서 김장생(金長生)·정구(鄭逑) 등에 의하여 예학(禮學)이 융성하게 일어났던 시기이다. 이와같이, 도학(道學)의 정통성은 확립되었지만 임진왜란의 충격 속에 사회질서의 변화가 진행되었을 때는, 사상적으로도 정통적 도학의 성리학적 관심에서 벗어난 새로운 요구가 대두되었던 시기이다.
그것은 곧 한백겸(韓百謙)의 《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에서 보여준 실증적 고증에 의하여 고대의 전제(田制)에 있어서 주자의 견해도 추측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음을 밝혔던 사실이나, 남언경(南彦經)·이요(李瑤) 등 양명학의 이론에 호의를 가지는 태도의 출현을 들 수 있다.
2. 사상성격
이때의 이수광의 사상적 성격을 분석하여 보면, 주자학을 존중하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그 당시 주자학의 기본문제인 태극·이기·사단·칠정 등 성리학의 이론에 뛰어들지 않고, 심성(心性)의 존양(存養)에 치중하는 수양론적 문제를 학문적 중추문제로 삼고 있는 데 그 특징이 있다. 비록 성리학의 이론적 분석이나 논변은 조선 후기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수광은 이러한 전통적 성리학파의 입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새로운 방향을 탐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의 철학적 기본문제가 심성의 이기론적 개념분석이 아니라 수양론적 실천방법의 탐색이라는 것은, 그만큼 그의 철학이 관념철학을 벗어나 실천철학적 성격을 지니는 것임을 말하여준다.
그의 저술 《지봉유설》 가운데 유도부(儒道部)에서, 학문·심학(心學)·과욕(寡慾)·초학(初學)·격언의 5항목으로 분류하고 있는 사실도 주자학에서 존중되는 도체(道體)의 문제나 성리학적 과제를 젖혀두고, 심성의 수양론적 관심 속에서 유학을 분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조진무실차자〉에서 정치의 효과를 이루지 못하고 사회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모두 부실한 병 때문이라 지적하였고, 모든 일을 처리하는 관건은 성(誠)에 있으며 성이 곧 실(實)임을 밝히고, 실심으로 실정(實政)을 행하고 실공(實功)으로 실효를 거둘 것을 주장하면서, 생각마다 모두 실하고 일마다 실할 것을 요구하는 무실(懋實)을 강조하였다.
그의 무실론은 구체적 현실의 성이면서 동시에 도덕적 성실성의 요구이다. 성을 모든 것에 일관하는 원리로 삼고, 이 성의 현실적 실현을 추구하는 것은 실학정신의 근원적 사유방법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그는 학(學)은 활쏘기와 같아서 과녁을 지향하는 것이라 밝히면서, 학문은 입지(立志)와 지향하는 바(所向)가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도 진리의 기준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학문적 개방정신과 더불어 학문의 수양론적 기능에 대한 요구에서, 학문은 습(習)을 귀하게 여기며 습을 통하여 숙(熟)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학습론(學習論)을 엿볼 수 있다. 함양성찰(涵養省察)하는 수양의 과정이 곧 학습이요 살아 움직이는 마음의 배양, 즉 성숙인 것이다.
이수광의 이러한 사상적 성격을 통하여 그의 철학적 특성이 도학의 정통성을 발판으로 하면서도 성리학의 이론적 천착에로 나가는 방향이 아니라, 인격과의 구체적 실현을 추구하는 실학정신의 발휘에로 지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수광은 한 선구적 위치와 구실을 감당하고 있는 비중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저술로는 《지봉집》 31권, 부록 3권이 있으며 《찬록군서(纂錄群書)》 25권이 있다고는 하나 확실하지 않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지봉집》권2의 시들.
1. 吹笛院
曾將一笛院前吹。 일찍 피리 하나를 가지고 역 앞에 불었던 때는
醉倚空山落日時。 空山에 해질 무렵 취해 있을 때인데
匹馬偶來追往事。 한 匹馬로 우연히 와서 지난 일을 더듬으니
澹煙芳草十年思。 옅은 안개 고운 풀 빛 10년(오랫)동안 그린 것들이네
2. 湘水驛道中
雨後淸和近午天。 비온 뒤에 개인 날시 한낮 때와 가깝고
驛樓芳草暗湘川。 역 따라간 고운 풀들 상수 따라 자운한데
誰知倦客征鞍上。 누가 알랴 지친 객은 탄 말 안장 위에서
半是吟詩半是眠。 반은 시를 읊기도 하고 반은 졸고 있을 줄.
+) 倦客 : 객이 타향을 유람하지만 여행하는 생활에 싫증을 느끼는 사람. (客遊他鄕而對旅居生活感到厭倦的人. 南朝宋鮑照《代東門行》:“傷禽惡弦驚, 倦客惡離聲.” 宋蘇軾《書普慈長老壁》詩:“倦客再遊行老矣, 高僧一笑故依然.” 宋陸遊《雙頭蓮》詞:“悲歡夢裏, 奈倦客又是關河千里.”) 여기서는 화자 자신을 지칭함.
3. 春宮怨
禁苑春晴晝漏稀。 비원의 비 개인 봄 날 낮 시간은 늘어지고
閑隨女伴鬪芳菲。 한가로이 친구따라 꽃놀이(鬪花) 하지마는
落花也被東風誤。 지는 꽃도 봄바람에 엇나가게 불려지고
飛入宮墻更不歸。 날려서 宮壇에 들어와서는 다시 못 돌아가네.
+) 禁苑: 궁궐 후원.
晝漏: 낮 시간을 말함. (謂白天的時間. 漏, 漏壺, 古代計時的器具. 漢荀悅《漢紀·成帝紀四》:“上素康壯無疾病, 向晨欲起, 因失音不能言, 晝漏十刻而崩.” 唐元稹《春六十韻》:“晝漏頻加箭, 宵暉欲半弓.” 宋楊億《咸平六年二月十八日扈從宸遊因成紀事二十二韻》:“玉輅天行健, 金壺晝漏長.” 明黃溥《閑中古今錄摘抄》:“《少保於公行狀》載景泰七年西湖水竭, 爲公不祥之兆似矣, 何不載是年七月間, 晝漏當申刻之末, 慧星如洗箒狀, 微見於西方?”)
鬪花: 옛날에 귀족의 여자들이 하던 습속으로 봄에 기이한 꽃으로 승을 다투던 것. (古代貴族婦女的一種習俗. 春時以戴插奇花爭勝. 唐王建《宮詞》之八三:“艾心芹葉初生小, 祗鬭時新不鬭花.” 五代王仁裕《開元天寶遺事·斗花》:“長安王士安, 春時鬭花, 戴插以奇花多者爲勝, 皆用千金市名花植於庭苑中, 以備春時之鬭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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