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방식.
0. 序
그러니까 이건 위로 같은 거다. 나를 위한 위로. 우리 외할아버지를 위한 위로 같은 거다.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글을 남겨 후세에 오래도록 자신을, 자신들의 뜻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나는 그들의 뜻을 공부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 정확히는 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쉽게 말하면 나는 지나간 것들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내가 옛날 것들과 씨름하는 사이에, 우리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우리 외할아버지도 내가 이해해야 할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평생 땅만 파오신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문인들처럼 번듯한 문장 한 줄 남기시지 않으셨다. 매일같이 옛날 글만 들여다보고 있던 탓에, 글도 없이 우리 할아버지를 이해하고자 하니 남겨진 것이 없어 너무 힘들다. 생전엔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을, 돌아가시고 나니 소통할 길이 없어 답답하다. 이 답답함을 어찌 해결할 수 없어 자꾸 마음에 응어리만 져가다 그냥 나다운 방식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글 한 줄 남기시지 못한 할아버지 대신에 내가 할아버지의 글이 되어 드리는 거다. 할아버지께서는 글 한 줄 쓰는 대신에 여섯 남매를 기르셨고, 또 여섯 남매는 또 제 자식들을 길러냈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나는 할아버지가 남긴 글자 같은 거다. 그래서 내가 대신 우리 할아버지에 대해 쓰기로 했다. 무뚝뚝한 할아버지와 무뚝뚝한 손녀가 만났으니 별 다른 추억거리도 없지만 그래도 실올 같은 기억이라도 붙들어 두고 싶다. 여기 우리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고, 내 할아버지로서 계셨다가 떠났다고, 그렇게 외치고 싶다.
이건 위로 같은 거다. 나를 위한 위로. 우리 외할아버지를 위한 위로 같은 거다. 현재형보다 과거형이 익숙한 나를 위한 위로, 그런 손녀를 위해 글 한 줄도 안 남기신 우리 할아버지를 위한 위로.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내가 공부하는 것을 지독히 싫어하셨으니, 이런 위로 방식을 달갑지 않게 여기실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할 줄 아는 게 읽고 쓰는 것 밖에 없으니 어쩌겠는가. 그래도 한편으로 이해하실 거다. 할아버지를 잃고, 여기에 이르기까지 차마 글로도 남길 수도 없던 시간들을 지나온 나였으니. 그걸 아시는 분이라면, 이해해 주실 거라 믿는다.
1. 그날.
그날은 설 연휴 전날이었다. 이틀 전에 갑자기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어 설 연휴까지 기숙사에 있었다. 연휴 아침에 일찍 집으로 출발하려고 했는데, 발을 묶어둔 작업을 새벽까지 하느냐 늦잠을 자버렸다. 뒤늦게 일어나 어차피 늦었다며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고 있었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일찍 온다더니 왜 안 오냐고, 엄마는 외할머니 모시러 시골에 가야 해서 아마 내가 집에 와도 엄마가 없을 거라고. 그리고 그 끝에 할아버지가 위독하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나는 몸을 일으켜 집으로 갈 준비를 했다.
그때도 나는 그냥 몇 년 전에 쓰러지셨던 것처럼 또 쓰러지셨구나 싶었다. 아흔세까지 사시면서 할아버지 삶에 몇 번의 고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시절에 처음, 그리고 대학생 때 한 번, 석사과정을 밟던 때. 내가 어른이 되어 갈수록 할아버지께서는 노쇠해져가셨다. 그 고비를 한 번씩 경험할 때마다 할아버지는 한 움큼씩 죽음에 가까워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게 곧 죽음은 아니었다. 마지막 고비에서는 의사도 기적이라고 말할 만큼 할아버지께서는 곧바로 기력을 회복하셨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렇게 그냥 지나가는 고비일 줄 알았다.
한 달 전에 뵌 얼굴은 정정하셨고, 내게 시집이나 가라며 호통치시던 모습이 선할 정도였으니까. 꼭 할아버지께서 정정하셔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음 한 켠에선 늘 할아버지께서 오래 살 거란 믿은 같은 게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친할머니께서 돌아가실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몇 번 했는데, 외할머니나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가끔 따라가는 병원에선 늘 좋아지셨다는 말만 반복했고, 연세가 많으시니 그냥 막연하게 나 박사 학위를 받을 때쯤 돌아가실 수는 있겠다 싶은 생각은 했었다. 내가 박사학위를 받는 모습도 보실 거라 생각했고, 아주 운이 좋으면 내가 결혼하고 증손주까지 안겨드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가 3시가 미처 안 되었을 때였다. 엄마가 설음식 준비하다 만 것이 있어 동생과 대신 준비했다. 엄마가 그 사이 전화를 한 번 했고, 그때 할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고, 돌아가실 것 같다고 했다. 설거지를 하고, 양파나 파, 당근, 시금치 따위를 다듬었다. 감자도 깎았다. 그러면서 내내 불안하긴 했다. 돌아가실 것 같다는 말은 처음 들어왔었으니까. 그래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설마, 하는 마음이 컸다.
내게 불운이나 불행이 오려면 전조 증상 같은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소설이나 영화에선 꼭꼭 그러던데, 내게는 어떤 힌트도 없었다. 그토록 많은 채소들을 다듬었는데도 칼에 손 한 번 베이지 않았다. 유리컵이나 접시를 곧잘 깨먹었는데도 유리 컵 하나 깨먹지를 않았다. 덤벙대다 넘어지지도 않았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거라는 생각은 한 적도 없었으면서 종종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꿈을 꾸었었는데, 그런 꿈도 안 꿨다. 심지어 그날은 꿈도 안 꾸었다. 그러니 내게 그런 불행이 있을 거라도 생각하지 않았다.
엄마가 한 번 더 전화를 해, 짐을 챙겨달라고 했다.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으로 가는 엄마를 만나 짐을 건네주었다. 그때 엄마의 얼굴이 보니, 그제서야 조금 실감이 났다. 진짜 돌아가실 수도 있구나, 하고. 아빠가 집에 오셨고 오시자마자 엄마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갔다. 집에서 걸어서 15분 걸리는 대학 병원이었다.
4시쯤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 보러 오라는 전화였다. 나와 동생은 부리나케 튀어나갔다. 둘 다 그렇게 외출복을 빠르게 갈아입은 적은 처음이었다. 걸어서 15분 걸리는 걸 뛰었다. 뛰는 것도 불안스러워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응급실에서 할아버지를 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을. 엄마가 왔다고 인사를 하라고 했다. 할아버지 귀에 대고 저 왔어요, 하고 인사를 했다. 제대로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눈물이 앞을 가리느냐, 숨이 주체가 안 돼 엉망이었다. 그래도 알아봐주시는 건지 할아버지의 호흡기가 한 번 들썩거렸다. 마치 왔냐, 라는 듯했다. 늘 왔냐, 라고 나를 반기시던 할아버지의 말투 같았다.
피가 말랐다. 속이 울렁거려 몇 번이나 밖으로 나갔다가 화장실에서 헛구역질을 했는데도 메쓱한 기분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그 사이 사촌 오빠도 오고, 오촌 아저씨들도 왔다. 할아버지께서는 그렇게 모두의 인사를 차례차례 받으셨다. 그러니까 할아버지께서 참 오래 기다려주신 것이다.
그리고 5시가 넘어서,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그냥 그렇게 떠나셨다.
양력으로는 2015년 2월 18일이었고, 음력으로는 12월 30일에.
흰 병원 담요에 쌓인 할아버지의 몸을 이모들이나 외숙모께서 쓸었다. 나도 마지막으로 할아버지 손이라도 쥐어보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생전에 안마도 몇 번 해드리지 못 한 게 맘에 걸려서. 신경성으로 종종 퉁퉁 붓던 그 종아리나 팔목을 무신경하게 지나쳤던 내가 너무 미워서. 그런데 후회해도 이미 너무 늦어버려서.
그리고 그제야 나는 내가 그리 좋은 손녀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엄청난 후회가 밀려왔고, 무척 부끄러워졌다.
세상에는 예상치 못한 헤어짐이 많다. 아흔 세가 넘으신 할아버지를 두었으면서도 나는 할아버지와 헤어질 준비를 못했었다. 그래서 그냥 늘 철없는 손녀로 살았고, 결국 끝까지 철없는 손녀로 남아야만 했다. 이제서야 할아버지와의 이해를, 대화를 시도하는 손녀이니, 스스로를 탓해야지, 어디다가 탓할 수도 없다. 남은 양가 할머니께 잘해드려야 겠다는 다짐도 얼마가지 못했다. 나중에 또 어떤 후회를 할지 스스로도 모르겠다.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답답하다. 그러는 한편, 시간이 지나고 나니 할아버지께 고마운 맘도 든다. 이 못난 손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를 주셔서. 산소호흡기를 끼고, 꺼져가는 숨을 붙드시고는 호흡 한 번 들썩이며 나에게 왔냐, 하고 마지막 인사를 해주시기 위해 기다려 주신 거다. 그리고 비록 악수라 할 수는 없지만, 응급실에서 할아버지의 피가 계속 돌게 하기 위해 할아버지의 손을 주물렀을 때의 감촉이 아직 생생하다. 말랐던 예전과 달리 딱딱하고 퉁퉁 부운, 그러나 따뜻했던 손. 그게 나와 할아버지의 최후의 악수라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악수까지 나누며 인사를 했다.
남들이 들으면 뭐라 하겠지만, 그게 나는 무뚝뚝한 외할아버지와 그보다 더 무뚝뚝한 외손녀다운 인사라 생각한다.
그 날이 벌써 50일이 지났다. 지난 주말엔 이른 49제도 치뤘다. 잠이 없으셨던 우리 할아버지치고는 긴 잠이다.
주말에 내가 드린 국화가 마음에 드셨을 런지 모르겠다. 꽃집 사장님이 꽃을 팔려고 그러는 말로 여겨지지만 생전엔 꽃을 안 좋아해도 귀신이 되면 좋아진다고 그랬으니, 할아버지도 좋아하셨으면 좋겠다. 다음에 뵐 때는 좋아하시는 커피나 한 잔 올리고, 화투 패나 하나 사드려야겠다. 봄 철이라 딸기도 많으니 좋아하시던 딸기가 철 지나기 전에 하나 사드려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긴 잠을 주무시고 계시지만 오늘도 편안히 주무셨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