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2008년 어버이날.
어버이날에 관련된 기억이라 어버이날 쓰려고 했는데 생업에 쫓겨 한참을 지나가 버려 이제와서 쓰는 글.
떠올리면 좋은 기억들이 있다.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그런 기억들. 회상 장면 자체가 환하고 밝고 포근한 그런 기억들. 포토샵으로 잔뜩 효과를 준 것 같은.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있는 기억도 어린 시절 기억이 대부분인데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기억이면서 주체가 내가 아닌 타인인 기억. 기억보다는 하나의 사진처럼 내 기억에 찰칵하고 찍힌 한 장면이다.
대학교 3학년이었던 어버이날이었다. 전날 저녁에 어버이 날이니 외가에 카네이션 사서 가라고 아빠가 용돈도 주셨길래, 수업도 자체휴강하며 외가로 향했다. 외가가 바로 인근 시라 차타고 막히지 않으면 30분쯤이면 가는 거리인데, 뱅글뱅글 도는 버스가 3시간에 한 대 뿐이라 시간을 맞추느냐 11시 에 버스를 탔던 기억도 생생하다. 외가와 우리집 사이에 대학 2개가 있는데 평일 오전이라 등교하는 학생들로 우글우글했던 버스나 대학생들이 모두 내리고 텅텅 빈 버스가 내달리던 한가한 시골길 따위들도 생생하다.
나름 서프라이즈 한다고 미리 연락도 안 하고 갔었다. 주무시거나 외출하시기 전엔 잠궈두는 일 없는 쪽문도 살짝 열고 마당도 소리없이 지나가서 현관문을 지나 안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그때 손님 오는 줄 몰랐던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는 이불 안에서 나란히 누워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나는 아직도 참 그장면을 떠올리면 참 행복하다고 느껴진다.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 지는 기분.
사실 그때 나는 당연히 할아버지는 안 계실 줄 알았다. 할아버지께서는 명절을 제외하고는 평일이나 주말이나 늘 노인회관에 있으셨으니까. 아침에 노인회관에 가셨다가 저녁 되어야(가끔은 저녁까지 드시고)오시는 할아버지셨으니까. 그때가 막 점심이 되었으니까 당연히 가셨을 줄 알았다. 그렇게 늦게까지 댁에 계신 건 처음 봤다. 게다가 그 늦은 시간까지 누워계실 줄은 생각도 못했다. 아마 나는 그때에도 할머니와 할아버지에 대해 잘 몰랐다 보다.
그리고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부부라는 걸 처음으로 제대로 인지했던 것 같다. 그냥 할아버지 할머니는 할아버지 할머니였으니까. 엄마아빠가 부부인걸 알았는데 이건 왜 모르고 살았는지 나도 참. 그때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니라 행복하게 도란도란 늙어가는 노년 부부 같았다. 백년해로라는 말은 완전히 이해하는 순간이었다고 해야 할까.
내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부르고, 내가 사온 꽃을 기특해 하시고,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셨다. 이상하게 분명히 할아버지도 좋아하셨던 걸 기억하는데 그 좋아하셨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할머니 얼굴은 기억나는데. 이게 내가 원래 그 얼굴을 기억 못하는 건지,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얼굴 뵌지가 오래되서 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점심먹을 때라고 반찬 꺼내서 상을 차려주셨다. 내가 갑자기 와 준비한 반찬이 없다고 할머니는 걱정을 하셨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콩밥이라 다행이라고 하셨고. 그때도 할아버지께서 나 왔으니 자장면 시키라고 그려셨다. 그냥 먹겠다고 반찬 괜찮다고 하며 밥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먹을 반찬 없다고 서둘러 김봉지 뜯어주시던 손도 생각난다.
점심을 먹고 할아버지께선 역시나 마을회관에 가셨고 나랑 할머니랑 둘이서 과일 까먹으며 TV도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버스 시간에 맞춰 돌아온 기억이 있다. 그때 버스정류장까지 마중나오셨던 할머니는 지금보다 훨씬 건강하셨는데, 할아버지도 정정하셨고 살아계셨는데....따뜻한 기억 속에 마음이 아픈 순간이다.
나는 그때 나중에 누군가와 결혼을 하고 산다면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분 처럼 늙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또 내가 결혼하고 싶은 유일한 이유이기도 하다. 우습게도 내 결혼에 대한 로망은 신혼의 달콤함도 아니고 노년에 맞춰져 있다. 어른들이 말하는 늙어서 등 긁어줄 사람 같은 거... 지금은 내가 결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만약하게 된다면 그렇게 살고 싶다. 오손도손 아들딸들 잘 키워서 장가보내고 둘이서 누워 늦은 오전 햇볕 받아가며 도란도란. 주름진 손과 얼굴도 사랑할 수 잇을까. 사랑받을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들.
내가 그때 받은 그 감명을 아무한테도 말 안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 할머니랑 수다 떨면서 그 이야기를 했었나 보다. 그 뒤로 몇 년 뒤에 할머니께서 그 이야길 꺼내셨다. 내가 그런 말을 했었다고. 그 말을 하셨을 때, 내가 그걸 말했다고? 부끄러워라,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말을 하시면서 뿌듯? 자랑? 스러워하시던 할머니 얼굴이 떠올라 그 이야길 말씀드리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할아버지께서는 봄이면 봄꽃구경, 가을이면 단풍 구경해서 할머니 손을 잡고 이리저리 구경다니셨다곤 하셨다. 심지어 나도 아직 데이트로 못 간 곳에서 자주 봄꽃 데이트를 하셨다고.
그제서야 나는 남편으로서의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내 기억 속엔 늘 성질급하신 할아버지께서 휘적휘적 혼자서 앞서 걸으셨던 기억이 나는데, 그래서 늘 무뚝뚝한 아빠, 무뚝뚝한 할아버지, 무뚝뚝한 남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였나 보다.
다시 떠올리면 할머니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마다 간병인을 따로 두시고도 오래도록 같이 병원에 계섰던 할아버지셨다. 내가 처음으로 혼자 할머니 병문안을 갔을 때가 내가 고2였었다. 그때도 할아버지께서는 나만 할머니를 지키는 걸 영 못미더워하시다가 곧 외숙모 오실꺼라는 말에 안심하고 떠나셨지. 기억이 난다. 늘 그러하셨듯이 혼자 갈 수 있다고 또 휘적휘적 길까지 건너시던 모습을. 그땐 정정하셨으니 정말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던 모습이 생생하다. 나는 소심하게 길 반대편에서 할아버지가 버스에 오르시는 걸 보고, 자리에 앉는 것 까지 확인하다 병실로 올라갔었다. 그 뒤로 우매한 손녀는 면허를 따면 해결될 일을 면허는 안 따고 늘 전전긍긍 버스에 못 앉으실까봐, 택시를 타시고선 이상한 데서 내릴까봐 조바심을 냈지.
또 함께 우리집 차나 다른 이모 차, 혹은 택시를 탈 때 두 분이서 손을 꼭 잡고 계셨던 기억도 있다. 우리 집 앞에 있는 대학병원에 진료 받으러 주기적으로 오셨는데, 한 분만 진료받는 데도 꼭 두 분이서 같이 오셨었다. 두 분의 몸이 매우 안 좋아지기 전까지는 늘 항상 같이 다니셨었다.
그러보니 두 분이서 오손도손 참 같이 잘 다니셨었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시면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할머니를 부르셨던 할아버지. 돌아가시길 전날 밖에서 먹은 음식이 무척이나 맛있었다며 할머니 몫을 사오신 할아버지. 삶의 마지막까지 누군가를 돌보고 챙기신 할아버지께서는 참 다정한 남편이셨던 걸 나는 한참 후에 알았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혹은 누군가에게 그렇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래서 우습게도 내 이상형은 지금 당장도 아닌 50년 뒤 쯤인 말년에 그렇게 나랑 오손도손 살아갈 남자이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혼자가 되신 할머니께선 상실감이 크셔서 그런가 몸이 더더욱 안 좋아지셨던 걸 생각하면 약간 고민도 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한평생 의지할 수 있었던 이가 있었다는 건 할머니와 손녀의 관계를 떠나서 인간으로서 무척이나 부러운 점인 것 같다.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그때가 내 기억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할아버지 할머니와 셋이서만 밥을 먹은 기억이다. 나 혼자서 외가에 간게 그때가 처음이었고, 갔을 때 할아버지께서 마을 회관에 안 계시고 댁에 계신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할머니랑은 둘이서 먹은 기억이 몇 번있는데, 할아버지까지해서 셋이서 먹은 적은 그때가 유일하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나도 몰랐던 추억 하나가 더 있다는 사실이.
무뚝뚝함 속에 속 깊은 다정함을 지니고 계셨던 할아버지께선 잘 지내고 계실까. 그렇게도 손녀딸 결혼하는 걸 보고 싶어 하셨으니 하늘에서 할아버지 닮은 이 하나 던져주시려나 모르겠다.
오늘밤에도 편안히 주무셨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