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꾸중
며칠 전 외가에 가서 비닐하우스에 볼일이 있어서 들어갔다가 나온 적이 있다. 엄마가 비닐하우스 문을 제대로 못 닫고 나오셔서 나도 모르게 엄마께, “엄마 문 저렇게 닫으면 할아버지한테 혼나.”라고 말했다. 엄마는 웃으면서 “이제 할아버지 없어서 안 혼나.”라고 했다. 외가에 가면 엄마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 “그렇게 하면 할아버지한테 혼난다.”였다.
할아버지는 늘 말수가 적으셨고, 엄마나 이모들이 할머니에게와는 달리 할아버지를 어려워하는 것을 보아서 그랬는지 나도 할아버지를 엄하다고 생각했다. 이모랑 엄마가 해주는 옛날이야기를 들으면 할아버지는 늘 무서운 아빠셨다. 그래서 엄마한테 ”할아버지한테 혼난다“라는 말을 들으면 진짜 혼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저 말은 어렸을 때 자주 들었었다. 가장 어릴 때 기억은 무척이나 더웠던 여름에 물호스로 사촌 오빠와 물장난을 치다가도 들었다.
또 내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할머니댁 화장실은 재래식이었다. 현대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개조해서 지금이야 부엌도, 화장실도, 욕실도 있지만 예전에는 모든 게 재래식이었다. 화장실이 얼마나 재래식이였나 하면, 푸세식인 건 당연한 거고 화장실이 집 밖에 있었다. 외가가 아주 깡촌도 아닌데 그랬다. 어린 나는 당연히 그 화장실이 싫었고, 평소에는 참고 갔지만 밤에는 절대 갈 수 없는 곳이 외할머니 화장실이었다. 종종 화장실 옆 밭에다가 볼일을 보기도 했는데 어느 날은 그것도 무서워 마당에다 볼일을 본 적이 있다. 그때도 엄마는 “너 할아버지가 알면 호온난다.” 라고 말했었다.
좀 커서는 고추랑 콩 따는 일을 잘 못할 때, 이렇게 하면 할아버지가 싫어해서 꾸중할 거라고 엄마한테 잔소리 듣기도 했다. 또 외가에서 설거지 할 때 물 펑펑 쓴다고 그 소리를 몇 번 들었었다.
지나치게 사소한 일까지 하면 외가에서 있는 날 중 절반은 그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울 엄마가 괜히 하는 소리는 아니고, 그만큼 할아버지는 깐깐하고 엄격한 분이셨다. 그런데 사실 엄마가 그렇게 말한 일로 혼 난 적이 없었다. 전부 엄마에게 혼날 거라는, 할아버지께서 싫어하신다는 핀잔뿐이었다. 호스로 장난칠 때도, 마당에 볼일(?)을 봐도, 할아버지는 벌어진 일을 확인하시고 조금 노여워하셨지만 나를 따로 혼내거나 한 적은 한 번도 없으셨다. 엄마의 예상은 그렇게 빗나갔다.
심지어 고추나 콩을 잘 못 따도 별 말씀 없으셨다. 언젠가 비닐하우스 비닐을 교체할 때, 내가 잘못 잡고 있어서 그 비싼 비닐이 찢어졌는데도 나한테는 아무 말씀 없으셨다. 비싸다고 좀 뭐라 그러시긴 했지만 꾸중 들었단 느낌은 아니었다. 가끔 일을 시키셔도 못 미더워하시기는 했지만, 원래 공부하는 애들은 일을 못하는 법이라고 넘어가셨다. 오히려 내가 일을 잘하면 신기해하셨던 할아버지시니까.
그렇다고 단 한 번도 혼난 적인 없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엄마한테 ‘할아버지께 혼난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을 때가 바로 음식을 남길 때였다. 할아버지 세대라 어쩔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나는 음식을 종종 남겼다. 오랜 경험으로 할머니 화장실을 이용하지 않으려면 적게 먹어야 한다는 본능 때문이었다. 또 손녀 왔다고 그득그득 차려주시니 어쩔 수 없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남았으니 다 먹으라고 늘 꾸중하셨다. 좀 머리가 굵어서는 그마져도 듣지 않았으니 참 나쁜 손녀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음식 남겼다고 혼났을 때가 대학교 4학년 때였다. 그때만 해도 외가에서 김장을 모여서 했다. 엄마 스케줄 때문에 외가에서 자면서 김장하지는 못하고, 일찍 와서 배추를 절여놓고 가서 다음날 늦게 다시 오기로 했다. 그래서 나와 엄마, 할머니 셋이서 배추를 반으로 쪼개고, 소금에 절이는 일을 했다. 할아버지께서 밥 때인데 김장이라 정신없고, 나도 왔으니 음식을 시켜주신다고 했다. 주변이 공장 아니면 농경지 밖에 없는 외가에서 시켜주는 음식은 중국음식이 다였다. 그래도 중국음식이면 우리 할아버지께서 생각하시는 배달음식 중에 진수성찬이라 그때 좋아라했다. 예전에 내가 문득 연락도 없이 혼자 외가에 찾아가면 할아버지께서 반기시며, 중국음식이라도 시켜줄까, 하셨던 기억이 있어서였다.
너무 많이 시켜서 엄청 남겼더니 엄마가 또, 이렇게 음식 남기면 할아버지한테 혼나, 이랬다. 할아버지는 음식 남기는 걸 제일 싫어하셔. 라는 말도 덧붙이시면서. 역시나 할아버지께서 다 먹으라고 뭐라 하셨다. 몇 번 먹는 척 하고 결국 남겼었다. 뭐라고 혼내셨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자장면 그릇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뭐라 하셨던 건 기억이 남는다.
꾸중은 어릴 때보다 커서가 더 심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부터는 취업 안하고 공부한다고, 시집 안 간다고 꾸중하셨다. 왜 그러느냐 엄마 고생 시키냐는 게 주된 이유였다. 엄마 고생은 내가 아니라 동생이 시킨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외가에 잘 안 들리는 동생 핑계를 대봤자 소용없는 걸 알아서 그냥 웃고 말았다. 엄마가 한 번은 내 편 들어준다고 자꾸 그러면 쟤 이제 잔소리 듣기 싫어서 외가 안 온다고 하면 어쩌냐고, 그랬더니 그 뒤로 외할머니께서는 그 소리를 잘 안하셨다. 그래도 뚝심 있는 우리 할아버지는 끝까지 내게 그 소리를 하셨다. 마지막으로 들은 꾸중도 “공부 그만하고 시집 가! 이제 네 차례다.” 였다. 돌아가시기 네 달 전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꾸중이 그거라서 그랬을까.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공부한 걸 참 후회했다. 결국 하고 있기는 하지만 부모님 돌아가실 때가 돼서야 할 줄 알았던 후회를 이렇게 일찍 할 줄은 몰랐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꾸중, 혹은 소원도 못 풀어드리니 아직 나는 못난 손녀 그대로 남아있다.
이제 더 이상 엄마한테 “그렇게 하면 할아버지한테 혼나.”라는 말을 들을 일도 없고, 지팡이까지 휘둘러가며 내게 꾸중할 사람도 없으니 아마 나는 계속 못난 상태로 남아 있을 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사진 속의 할아버지는 내게 엄한 표정인데, 나한테 엄하게 꾸중하셔야 할 분이 안 계신다. 사실 할아버지는 내게 그리 엄격한 분도 아니셨는데 왜 그리 무서운 분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지팡이 휘두르시며 내게 시집가라고 하실 때, 나는 무섭다거나 혼났다는 마음보단 할아버지의 그 정정함이 뿌듯했었는데 말이다. 또 엄마가 잔소리 듣기 싫어서 외가댁 오기 싫어하면 어쩌냐고, 했던 말은 그야 말로 기우인 걸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할아버지께서 안 계셔서 아쉽다. 아마 할아버지께서도 엄마가 괜히 협박한다는 걸 아셔서 끝까지 꾸중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유일하게 들은 꾸중 세 가지는 아직도 어렵다. 여전히 나는 음식을 곧잘 남기고, 취업도 안하고 시집도 안 가고 있다. 먼 훗날 만났을 때, 덜 혼나도록 노력해 나간다면 할아버지도 그만큼의 이해심은 보여주실 거라 생각한다. 그때까지 잘 지켜봐주셨으면 좋겠다.
긴 잠을 주무시고 계시지만 오늘도 편안히 주무셨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