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가운 손녀는 아니었지만 우리 사촌들 중엔 내가 가장 살갑게 구는 손주였다는 사실은 자부한다.
언젠지 정확히 기억도, 왜 그랬는지 기억도 정확히 안 나지만 이상하게 그 순간만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러니까 내가 살가운 손녀인 것처럼 할아버지와 나름의 대화를 시도했던 첫 순간이.
몇 살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옥수수 때문이란 건 기억한다.
그땐 외가에서 옥수수 밭이랄 것도 없이 6남매의 가족끼리 나눠먹을 정도의 양의 옥수수를 밭 구석에 심어놓고 키웠었다. 그날 할아버지는 옥수수 밭 구석에 웅크리고 앉으셔서 옥수수 껍질을 벗기고 계셨다. 내가 좋아하는 옥수수라 그랬는지, 그냥 침묵을 못 참는 내 수다스런 성격 때문인지, 아님 정말 궁금해서 그랬는지 나는 할 일도 없이 할아버지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생각해보면, 아궁이 불 때던 아주 옛날 말고는 그렇게 할아버지 일하시는 데 옆에 앉아서 구경한 것이 참 오랜만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옥수수 벗기는 할아버지를 구경하다가
“할아버지, 옥수수가 이렇게 감싸져 있는 데 어떻게 익었는지 알아요? 수염보고 알아요?”
하고 시덥잖은 질문을 했다. 할아버지가 뭐라뭐라 대답해주셨는데 기억이 안 난다. 아예 기억에 없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절로 안다는 뉘앙스의 대답이라 그때도 이해가 잘 안 가는, 시원스럽지 못한 대답이라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그때 나는 그 밭에 할아버지랑 나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엄마가 보셨는지 나중에 그 얘기를 꺼내셨다. 할아버지 무서워하지도 않고 옆에서 붙어서 말을 건다고,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전엔 내가 그랬던 적이 없었고, 나 아닌 다른 손주들도 그런 적이 없었으니 다른 집에선 보통인 일이 우리 집에선 신기한 일이었다.
엄마의 그 의아한 반응이 싫지 않아서였는지, 나는 그 뒤로도 할아버지에게 그런 시덥잖은 질문을 했다.
파는 그냥 쑥 잡아당기면 당겨 나와요? 라던가, 콩깍지 보고 콩 익은 거 알아요? 라던가 할아버지 입장에선 그냥 알지,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꽤 난감하고 성가신 질문들을 두서없이 던졌다. 그냥 그땐 할아버지랑 할 말이 따로 없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은근한 자랑일 정도로(나중에 골치가 될 줄 할아버지도 모르셨겠지만) 책만 읽었던 외손녀였고, 할아버지는 평생 책 대신 땅만 바라보셨던 분이니까. 할머니처럼 드라마 이야길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에겐 엄마 외엔 접점이 없었다. 그렇다고 할아버지랑 엄마 욕을 하며 친해질 순 없으니까. 절로 알수 밖에 없었다. 할아버지에게 말거는 방법이 농사 이야기 밖에 없다는 걸. 어찌 보면 서글프지만 그랬다.
나중엔 이야기 범위가 확대되었다. 노인회관 가는 할아버지 부축 아닌 부축을 하며 노인 회관에서 보통 무얼 잡수시는지, 무얼 하고 노시는지 따위를 여쭈었다. 할아버지께 음식 하나 억지로 권하며 맛있으시냐고, 더 드실거냐고를 귀찮을 정도로 자주 여쭈었다. 화투패 짝을 맞추며 정리하시는 할아버지 곁에 앉아 뭐하시는 거냐고-아직도 짝맞추고 있는 것 외에는 뭔지 모른다- 질문을 했다.
나중엔 엄마뿐만 아니라 이모들도 신기해했다. 할머니가 먼 친척이나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면 나를 큰 딸의 큰 딸이라고 소개하며, 얘가 할머니 할아버지 제일 잘 따른다고 자랑하셨다.
이모들이 그냥 괜히 하는 말이란 걸 알지만, 언젠가 할아버지께서 장손인 사촌 오빠 다음으로 나를 예뻐하신다고 했었다. 그 말이 부러하는 말이래도 좋았다. 사촌 오빠 밑으로 다른 친손자가 있음에도, 친손녀도 둘이나 있는데, 외손녀인 나를 예뻐한다고 하는 게 좋았다. 그냥 나에게는 그게 자랑이었다. 무뚝뚝한 할아버지에게 남들 눈에도 사랑받는다는 게 보일정도라니, 하며 좋았고, 자랑이었다.
그래서 더 그렇게 사소한 질문들을 해댔다. 할아버지께 말을 걸려고.
근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서글프다. 할아버지께선 그냥 그렇다는 대답만 할 수 밖에 없는 질문을 던지는 손녀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할아버지와 손녀인 나 사이에 거리가 너무 멀어서 어색한 대화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좀 부끄럽다. 좀 더 재미난 이야기 대신에 옥수수 따위를 질문하고 있는 손녀라니.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에도 나는 종종 말을 건다. 할아버지께서 달 없는 밤에 돌아가신 게 자꾸 마음에 걸려 달만 보면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져서 달을 향해 말을 건다. 여전히 별로 할 말이 없어서 나는 여전히 잘 계시냐고만 묻는다. 이것도 그냥, 이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는 질문이다.
우린 그냥 그런 할아버지와 손녀일 수밖에 없나 보다. 헛웃음이 난다.
그저 그런 대화만 나누었던 우리였지만, 그저 그런 대화 속에서도 내가 할아버지를 사랑했던 마음이 묻어났었기만을 바란다. 옥수수가 익어가는 걸 그냥 아셨던 할아버지였으니까 아마 그냥 아셨을 것이라고 믿는다.